[강신주] 철학 vs 철학
2012/02/05 17:16 폐인의책장/밑줄긋기
책상을 보고서 책상은 이렇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되풀이해서 중얼거리는 모습, 물론 이것은 사후적 구성의 매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 자신이 사후적으로 구성한 본질을 우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순간 의도치 않게 우리 자신은 보수주의자로 변할 수도 있다. 가령 누군가가 책상에 편하게 걸터앉으려고 한다면, 책상의 본질을 맹신하는 사람은 상당한 불쾌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p.24
당신이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결국 당신의 한 가지 집착 혹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p.25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라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사랑하고 찬양해 줄 사람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자신의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 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이것을 읽는 사람들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 <팡세> 파스칼
pp.88~89
권력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이 없는 존재, 즉 글자 그대로 노예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양도받은 대표자는 과잉된 권력을 가진 존재, 즉 새로운 형식의 군주처럼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게 된다. 자발적인 권력 양도가 논리적으로 '자발적인 복족'으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대의 민주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적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에로의 이행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서 기능하는 것일 뿐이다.
p.97
조선사회는 현재 우리 눈에 일면 동방예의지국인 것처럼 비칠지라도 결코 윤리적인 사회라고 보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한 사람의 인격과 그의 자유를 배려해주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윤리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 개인의 자유를 고려하지 않고 부과된 인간의 예절 혹은 다양한 규범들은 윤리와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p.122
니체는 정신도 육체와 마찬가지라고 이야기 한다. 과거의 기억들이 정신에 가득차 있다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과거 기억의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살아 있는 현재가 있을리 만무하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낯선 것으로, 그래서 불편한 것으로 경험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는 변화보다는 불변에, 차이보다는 동일성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역동적인 변화와 화려한 차이를 긍정할 수 없기 때문에 기억 능력만이 강한 사람은 불행으로, 우울함으로, 절망으로, 그리고 소심함으로 현재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p.200
바람 때문에 사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를 두고 두 승려가 논쟁을 벌였다. 한 승려는 깃발이 펄럭인다 하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플럭인다고 했다. 둘의 논쟁이 해결 되지 않고 반복되자 육조 혜능이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다. 너희들이 마음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다." 두 승려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무문관>
p.236
사르트르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즉 자신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대자'For-itself라는 개념으로 의도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itself에 '대해서'For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p.258
어떻게 하면 이 익명의 도시인들, 자신의 사적인 일에 몰두하는 고독한 개인들을 모여들게 할 것인가?
사실 이것은 정치가들에게는 사활을 건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가들은 고독한 개인들, 즉 군중을 먼저 묶지 않는다면, 이들이 어떤 우발적인 계기로 상호 연대하여 자신들에게 저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1871년 기존 대표자들에게 격렬히 저항하며 파리를 장악했던 파리코뮌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1895년 르봉(Gustave Le Bon)이 『군중심리학』을 썼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치가들은 자발적으로 군중들이 상호 연대하기 전에 그들을 다른 논리에 근거해 응집시킬 필요가 있었다.
pp.326~327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 있다. 부당하게도 자신의 현재 삶은 행복하지 못한다는 일종의 피해의식 말이다. 또한 이런 피해의식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에게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비관도 함께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자신도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은, 바로 부르디외가 말했던 귀족적 취향이나 선택받은 소수가 되고 싶은 욕망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p.337
사랑에 빠진 주체는 타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무엇인가가 있다고 상상한다. 이렇게 상상된 타자의 모습이 실재 타자의 모습과 부합되면, 사랑은 촉발되지 않는다는 것이 라캉의 근본적 입장이다. 그것은 마치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욕망이 곧바로 충족되기 때문이다. 반면 상상의 모습이 실재의 모습과 일치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상상에 계속 집착할 때, 사랑은 불꽃처럼 타올라 결코 꺼지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욕망과 마찬자기로 사랑도 역시 결여를 전제로 한다고 보았다.
p.345
패러다임이란 말은 '패턴', '모델', '예'를 의미하는 희랍어 '피라디에그마'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쿤은 패러다임을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 풀이의 표본"이라고 정의한다.
pp.356~357
나의 죽음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발언하는 데 구조적으로 필수적이다. …… "나는 살아 있다"라는 언표는 나의 죽어 있음을 수반하며, 그것의 가능성은 내가 죽어 있을 가능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거꾸로도 그렇다. 이것은 포Edgar Allan Poe의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위에서 우리는 "나는 존재한다"에서 출발해서 "나는 죽을 자로 존재한다"에 이르렀던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는 죽어 있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목소리와 현상> 데리다
pp.392~393
음성중심주의나 순수한 주체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나는 살아 있다"라는 말 자체가 죽음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그들은 "나는 살아 있다"라는 말 자체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표현하는 순수한 음성 표현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당혹스러운 생각이 아닐까? 예를 들어 애인이 전화로 "나는 살아 있어!"라고 다급하게 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응할까? "그럼 당연히 살아 있지. 살아 있으니까 전화를 한 것 아니겠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애인이 "나는 살아 있어!"라고 말하면, 우리들은 "무슨 일 있었니? 지금 괜찮은 거니? 많이 다친 건 아냐?"라고 되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아무리 순수해 보이는 음성 언어 혹은 순수 의식도 결국 차이의 세계, 즉 일정한 텍스트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차이의 세계를 떠날 수가 없다.
pp.393~394
이 사람의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을 수도 있다. 핵심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그는 도중에 아주 조그만 어느 역 부근 오지에 내린다.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 알튀세르
p.412
알튀세르는 진정한 유물론자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데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이란 사회적인 분류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직접 그 사람을 보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가 자신보다 늙었다거나 혹은 젊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유물론자는 이런 평가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자신보다 늙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존경하지도 않고, 혹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독적인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서 대우할 뿐이다. (...)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행 도중에 마주치는 우발적인 사건,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기쁨 혹은 슬픔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pp.412~413
즉, 주종 관계는 기본적으로 폭력과 이에 근거한 결핍의 발생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문제는 결핍된 자들이 이런 결핍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 있다. 마치 자신은 본성상 결핍된 존재인데, 이런 결핍은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결핍을 채워 주는 사람이 바로 애초에 결핍을 만들어 낸 장본이기도 하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주종 관계의 내적 논리이다. 주종 관계는 원초적인 폭력, 즉 원초적인 수탈을 통해서 피통치자들을 결핍의 상태로 만들고, 수탈한 것을 제한적이나마 수탈당한 자들에게 재분배함으로써 피통치자들의 결핍 상태를 심화시키면서 유지되는 것이다.
p.418
결국 장수로서의 오자의 솔선수범과 병사들에 대한 애정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오기열전」을 보면 오자의 속내를 간파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바로 아들의 종기를 장군인 오자가 직접 빨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통곡했던 병졸의 어머니였다. 병졸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장군의 정성에 감복해서 목숨을 내던지고 싸우리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어머니는 오자의 행동이 그 자체로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pp.473~474
고대의 플라톤으로부터 현대의 러셀에 이르기까지, 논리중심주의 혹은 이성주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논리의 한계란 매우 명확한 것이다. 누구에게든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논리에는 타자란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대화 상대방, 즉 타자의 속내를 읽으려고 하지 않고 말꼬리만을 잡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이점에서는 논리는 보편적인 것 같지만, 그 내면에서 지독한 유아론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509
저의 의술은 환자의 맥을 짚어 보거나 기색을 살펴보고 목소리를 들어 보거나 몸의 상태를 살펴보고 목소리를 들어 보거나 몸의 상태를 살펴보지 않아도 병이 어디에 생겼는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양陽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음陰에 관한 증상을 미루어 알 수 있고, 음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양에 관한 증상을 알 수 있습니다. 몸속의 병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굳이 천리 먼 곳까지 가서 진찰하지 않아도 병을 진단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아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 <사기> 편작착공열전
'양에 관한 증상' - 겉으로 드러나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상
'음에 관한 증상' - 피부 속에 숨겨져 있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장기들과 관련된 증상.
저의 의술은 환자의 맥을 짚어 보거나 기색을 살펴보고 목소리를 들어 보거나 몸의 상태를 살펴보고 목소리를 들어 보거나 몸의 상태를 살펴보지 않아도 병이 어디에 생겼는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양陽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음陰에 관한 증상을 미루어 알 수 있고, 음에 관한 증상을 진찰하면 양에 관한 증상을 알 수 있습니다. 몸속의 병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굳이 천리 먼 곳까지 가서 진찰하지 않아도 병을 진단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아 감추려고 해도 감출
p.525
(하우스 초기 시즌에 환자를 직접 보지 않았던 하박이 생각남)
먼저 내가 세계를 사랑해서 현재의 세계에 무언가를 덧붙여 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나는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신을 무화시킨 것처럼 결구 세계도 무화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를 이용하고 세계를 손상시켰던 것이다. ……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음껏 하고 있을 뿐이다. 왜 내가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하면 안되는가! -<유일자의 소유> 슈티르너
p.547
백성자고는 한 개의 터럭으로써도 남을 이롭게 하지 않았고, 나라를 버리고 숨어서 밭을 갈았다. 우임금은 한 몸을 가지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않았고 그의 몸을 지치고 깡마르도록 만들었다. 옛날 사람들은 한 개의 터럭을 뽑음으로써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하여도 뽑아주지 않았고, 천하를 다 들어 자기 한 사람에게 바친다 하더라도 받지 않았다. 사람마다 한 개의 터럭도 뽑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 -<열자> 양주
p.550
대개의 사람들이 전체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든 원인이 국가나 국가가 추구하는 이념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때, 오직 양주만은 무질서의 원인이 '바람직한 사회를 삶을 희생하라'라고 선동하는 유가 혹은 묵가의 국가 지향적 이념에 놓여있다고 간파했기 때문이다.
p.551
세계의 평화나 안정은 대다수 개체들의 삶이 그 자체로 긍정될 때에만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p.552
개체가 곧 전체라는 화엄의 관점은 제국의 논리를 구사하는 정치권력자들의 구미에도 잘 맞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개체의 단독성을 무시한 어떤 사유라도 쉽게 전체주의에 오염 될 수 있다는 점이다.
p.639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것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예사람은 "외부로 치달아서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느 곳에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될 것이다. -<임제어록>
p.656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 <동아일보> 1925년 1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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